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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히어. 마이 네임 이즈 정숙자. 아이 러브 마이 셀프.”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일성여중 1학년 5반 교실, 영어 교사 박인화씨가 출석을 부르자 일성여중 최고령 신입생 정숙자(81)씨가 손을 번쩍 들고 답했다.
일성여중고는 어린 시절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만학도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을 정식으로 수료할 수 있도록 설립된 학력 인정 평생학교. 이곳에서 1 남성직장인 000여 명 학생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공부한다.
◇“국졸 딱지에 포기한 첫사랑…부끄럽지 않은 할머니 되고파"
전남 목포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정씨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 후 의상실에 취업했다. 공무원 아버지는 아들들과 막내딸만 대학에 보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오빠들을 보며 영어를 공부하고 기준금리 인상 싶었던 그는 가족들 몰래 무료 영어 교습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정숙자씨가 일성여중 교실에서 영어책을 펼치며 웃고 있다. /최하연 기자
20대 초반엔 본인 이름을 건 의상실을 차려 커리어 우먼이 됐다. 남성들의 구애 신용회복위원회 프리워크아웃 가 잇따랐지만, 그때마다 국졸(국민학교 졸업) 학력이 발목을 잡았다. 첫사랑은 대졸(大卒) 남성이었다. 데이트 자리에서도 영어를 섞어 쓰며 ‘지적 수준’을 재보려 들었다.
첫사랑과 헤어진 후 여러 차례 오빠들을 통해 선이 계속 들어왔지만 “국졸 여동생은 부끄럽다”며 번번이 오빠들 선에서 막혔다. 학력이 족쇄가 된 삶이었다. 결국 정씨는 2 전세보증금이란 0대 후반에 결혼했다. 그러나 시집살이는 더 혹독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국졸 여자에게 고졸 남편이 웬 말이냐”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그녀는 아들 하나, 손녀 하나를 두었다. 손녀는 정씨를 꼭 닮아 손재주가 뛰어났다. 정씨는 “못 배운 한(恨)은 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며 손녀를 미국 유학까지 보냈다. 손녀는 미용대학을 졸업하고 대 자유적금이자계산기 기업에 입사했다. 어느 날 손녀가 “할머니는 평생 영어 공부에 집착하면서 왜 아직도 영어한마디를 못해?”라며 묻는 질문에 그는 답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했지요. 부끄럽지 않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요.”
◇“전쟁·가난에 멈춘 학업… 질문 같은 질문하라는 남편에 서러웠죠"
정씨에겐 특별한 일성여중 선배가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일성여중 2학년 선배 김동인(84)씨다. “언제까지 손녀 앞에서도 국졸을 숨길 거냐. 전혀 늦지 않았으니 손잡고 함께 공부해보자” 김씨는 1년 넘게 정씨를 설득해 지금은 둘도 없는 학교 동문이 됐다.
일성여중 선후배 정숙자씨(왼쪽)와 김동인씨(오른쪽)가 함께 찍은 사진 /정숙자씨 제공
김씨 역시 학업의 끈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1950년,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해 전쟁이 터졌고 학업은 그대로 끊겼다. 열일곱에 어렵게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의 기대는 공부보다 남동생 뒷바라지였다. 중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결혼은 했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은 남았다. 남편은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학식 있는 사람’이었기에, 김씨에게 “질문 같은 질문을 하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수십 년을 말문 막힌 채 살았다.
일성여중에 입학한 건 지난해. 용기를 내기로 했다. 2학년 6반 김동인 학생은 곧 반의 유명인이 됐다. 국어 필기는 제일 꼼꼼하고, 글씨는 또렷하고 예뻤다. “사자성어 시험만 쳤다 하면 만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씨는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매일 춘천→서울 통학…“14살에 멈춰 있던 꿈 찾게 돼”
일성여중고엔 정씨와 김씨 말고도 못 배운 설움을 이겨낸 이들이 많다.
매일 춘천에서 서울까지 최장거리 통학 중인 일성여고 1학년 장주선(71)씨는 춘천에서 서울까지 매일 왕복 4시간, 새벽 4시에 눈을 뜬다. 경춘선을 타고 일성여고로 향하는 그의 가방엔 중졸이라는 꼬리표를 떼겠다는 결심이 가득하다. 장씨는 10대 시절, 동생 다섯을 부양하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접었다. 카드회사에 입사해 “실적 1등 사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인사고과 앞에선 늘 학력이 발목잡았다.
20년간 조계종에서 봉사를 하던 장씨에게 친구가 “너를 위해 한 번 살아보라”며 고등학교 입학을 권유했고, 장씨는 용기 내어 입학하게 됐다. 장씨는 “자녀들에게도 부끄러워 숨겼던 중졸 딱지를 당당히 떼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중고 앞에 '입학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최하연 기자
일성여고 2학년 3반 김승주(65)씨는 “이 학교에 와서 14살에 접었던 꿈을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학교에 못 갔다. “입학 신청 날짜를 놓쳤다”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김씨는 교복 대신 교복 만드는 공장에 가야 했다. 22살에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고, 일곱 식구의 밥을 하며 40년을 보냈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한 후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 학력을 적을 때면 김씨는 망설였다. 결국 ‘중졸’이라고 적었지만 속내는 “국졸인데”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예순 넘은 나이에 우연히 일성여중고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날로 자녀들에게 “엄마 사실 국졸이야. 그런데 지금부터라도 배울 거야”라고 고백했다. “뒤늦었지만,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이제부터가 진짜 제 인생이지요.”
1952년 야학으로 출발한 일성여중고가 성인 여성 대상 학력 인정 학교로 전환된 지 올해로 25년을 맞았다. 이 학교는 중·고교 과정을 정식 졸업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2년제 평생교육기관으로, 그간 수천 명의 만학도를 사회로 다시 내보냈다.
이선재 교장은 “못 배운 서러움은 숨기고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며 “혼자만 배우지 못한 줄 알았던 이들도 이곳에 오면 모두 같은 신세라는 사실에 위로받는다”고 했다. 이어 “일성여중고 학생들이 배움을 놓친 것은 개인 탓이 아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고, 가난했고, 남자 형제에게 밀렸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정숙자씨가 영어 공책에 영어 공부를 한 모습 /최하연 기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여성 중 초졸 이하 학력자는 14.8%로, 전체 평균(10.6%)보다 높다. 이들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겪으며 의무교육 사각지대에 놓였던 세대다. 남성들은 군 복무나 생계형 경제활동으로 글을 익힐 기회라도 있었지만, 여성들은 글이 필요 없는 노동 현장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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